구리 당일치기 여행 - 동구릉, 구리전통시장, 현대아울렛 스페이스원, 구리타워 서울 근교 가볼 만한 곳
본문
2025학년도 부산고구려$ 《고등학교 한국사 1. 2》 분석표 참고.1. 2015년부터 사용예정 교과서를 ①2014~2024 사용 검정 한국사교과서를 ②로 표시2. 9종의 검정교과서 출판사 이름 축약표*동아출판→동아/씨마스→씨마스/지학사→지학/한국학력평가원→한평/미래엔→미래/리베르→리베/비상교육→비상/해냄에듀→해냄/천재교과서→천재/ Ⅰ. 전체 편성지침의 문제 1. 뉴라이트의 ‘식민지근대화론’에 꿰맞춘 시기구분 ①은 한국사 70만년의 기준을 ‘근대’로 설정하여 ‘근대’를 절대시하고 있음. ‘Ⅲ 근대국가 수립의 노력’의 시작을 ‘조선의 개항과 근대화(동)/국제질서의 변동과 개항’ 등으로 설정해서 일제에 의한 개항을 근대 시작으로 설정그림 천재교과서 1권 차례그림 한국학력평가원 1권 차례 → 9종의 교과서가 동일한 목차인 것으로 미루어 편성지침에 따른 것임 [긴급분석!] #2025년도_한국사_교과서_해부 - 모든 것은 근대로 부터?2.파트 분류의 비적절성①은 ‘Ⅰ 근대 이전 한국사의 이해’ ‘Ⅱ 근대 이전 한국사의 탐구’로 구분했는데, ‘이해’와 ‘탐구’의 차이가 무엇인지, 왜 이런 분류를 했는지 알 수 없음. ①2025년 검정교과서②2014~2024 검정교과서검토1권;Ⅰ 근대 이전 한국사의 이해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국가의 발전①은 구석기부터 고려 말까지 70만년의 역사를 전체 330여쪽 중 20여쪽으로 축소 서술→같은 시기를 420여쪽 중 100여쪽으로 축소했다고 비판받은 ②보다 더 축소→한국 고대·중세사 사실상 삭제 Ⅱ 근대 이전 한국사의 탐구Ⅱ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과 변천Ⅲ 근대 국가 수립의 노력Ⅲ 조선 유교사회의 성립과 변화2권Ⅰ일제 식민통치와 민족운동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국가 수립운동①은 ②에 비해 독립운동사 축소 서술, 식민사학 교과서라고 비판 받은 ②보다도 훨씬 식민사학 요소 강해짐Ⅱ 대한민국의 발전/Ⅲ 오늘날의 대한민국 Ⅴ 일제 강점과 민족운동의 전개/Ⅵ 대한민국의 발전과 현대 세계의 변화 Ⅱ. 일제 식민통치 미화 1) 1권에서는 이른바 개화, 근대라는 명목으로 일본을 극찬함 친일식민사학 요소한국 점령한 일본에 대한 칭송→일제 식민지배의 긍정으로 연결되는 서술들(식민지 근대화론) -고종 때의 조사시찰단 긍정적 서술*일본의 근대를 만난 조사시찰단(동 113)▲도쿄의 야경(일본 도쿄국립박물관) 도로의 양옆에는 쇠기둥을 줄지어 세우고 그 위에 유리등을 달아 저물녘에 불을 붙여서 새벽녘까지 끄지 않는다-강문형, 『일본문견사전』-(동아 113)→1881년의 조사시찰단들이 본 일본의 모습을 극찬→낙후된 조선은 일본을 본 받아야 되는 존재,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음그림 후카자와 유키치 칭찬(씨마스 1권 111)▲서구열강과 함께 조선과 중국의 분할에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한 정한론자 후쿠자와 유키치를 사진과 함께 실어 칭찬“비물질적인 어떤 면이 있으니 그것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고, 사고팔 수도 없으며, 꾸고 갚을 수도 없는 것이지만 온 나라에 퍼져 있고, 그 영향은 강해서 그것 없이는 어떠한 부산고구려$ 외형이라도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곧 문명의 정신이다.-후카자와 유키치, 『문명론의 개략』--후쿠자와 유키지 :문명개화론을 주장하여 일본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씨마스 111)” →후쿠자와 유기치의 한국 관련 실제 발언그림 이토 히로부미를 선각자로 표기(씨마스 1“우리 일본은 동양의 선구자이자 우두머리로서 지나(중국)와 조선을 유도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무력으로 협박하는 것이 필요하다(1883년 1월)”“만일 중국의 병력으로 조선의 내란을 진정시키고 그 정부의 자립을 돕게 되면 반도국의 전권은 더욱 그들 수중으로 들어가 조선독립의 결실을 거두는데 방해가 된다…중국정부가 원병을 보낼 경우에는 일본도 그들과 같은 수의 병력을 파병해 반드시 대등한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조선동학당의 소동에 대하여〉, 1894년 5월 30일)”→한국을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한 후쿠자와 유키치를 한국 학생들이 문명개화론을 주창한 선각자로 배워야 하는가?→이토 히로부미를 일본의 근대화를 앞당긴 선각자처럼 사진에 특별히 소개 그림 간도협약에 대한 모호한 서술(천재 1권, 137)*일본의 학교 풍경을 극찬▲한 교실에서는 또한 수십 개의 책상을 줄줄이 늘어놓고 영어책을 읽고 익히고 있었는데 이른바 사수라는 사람이 수업을 듣고 있는 자에게 지구괴(地球塊)를 짚으며 모처의 지명을 물으면, 한마디 한마디 가리켜 대답하는데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었다-송헌빈, 『동경일기』(천재 1권, 117) *간도협약에 대한 모호한 서술간도문제를 서술하면서 간도가 한국영토임은 밝히지 않고 조선과 청의 분쟁지역이라고 서술하고, 일제와 청이 1909년 체결한 간도협약을 소개하면서 제4조는 누락하고 제3조만 소개: “제3조: 청 정부는 이전과 같이 도문강 이북의 개간지에 한국 국민이 거주하는 것을 승인한다.-『순종실록』, 1909. 9.4.(천재, 137)”→한국 국민이 간도협약 이후에도 간도지역에서 합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것처럼 호도하고, 한국인의 재판권이 청국으로 넘어간 4조는 누락. “제4조 : 도문강 이북 거주 한국민은 법권(法權)에 복종하며 청국 지방관의 관할재판에 귀부(歸附)한다”→ 간도 한국인의 재판권은 청국으로 넘어간 사실은 삭제 2) 2권에서는 ‘Ⅰ일제 식민통치와 민족운동’ 중 ‘사회 문화의 변화와 대중운동’의 항목에 일제 식민통치 칭송하는 구절들을 다수 게재. 한국학력평가원 교과서는 노골적으로 일제 식민지배 칭송. 다른 출판사의 교과서들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수 긍정서술. 모든 교과서에 이 항목이 있는 것은 편찬지침에 반드시 서술하게 했음을 의미 ▲한국학력평가원 ‘2권 Ⅰ 일제식민통치와 민족운동’ 중 ‘04-사회·문화의 변화와 대중 운동’1)도시와 농촌의 변화*소제목: “식민지 근대 도시의 빛과 그림자”“개항 이후 일제 강점기까지 서울과 평양 등 전통적인 행정도시를 비롯하여 개항장인 인천과 부산·원상 등이 근대도시로 바뀌었고 부산고구려$ 일제의 대륙 침략을 위한 발판으로 건설된 경부선·경의선 등 철도로 인해 대전·신의주 등이 새로운 도시로 발전했다. 또한, 일본과의 쌀 교역이 증가하면서 군산·목포 등의 항구도시가 발전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식민지 공업화 정책으로 한반도 북부에 함흥과 청진 등 공업도시가 발전하여, 한반도 남부와 북부 간의 상업구조가 인위적으로 개편되었다(한평 2권, 56)”→일제 식민통치를 근대화, 산업화의 관점에서 서술 *소제목:대중문화의 유행“도시를 중심으로 근대 문물이 유입되고 생활에도 변화가 생겼다. 대중문화 또한 도시를 중심으로 빠르게 유행하였다. 라디오 방송국이 생기고 축음기와 레코드 보급이 늘어나면서 성악가 윤심덕이 발표한 「사의 찬미」 등 대중가요가 인기를 끌었다.…또한, 축구·야구·자건거 등의 근대 스포츠가 보급되면서 스포츠 클럽이 만들어졌고, 도시 간 혹은 학교 간 대항전은 대중의 관심거리가 되었다.(한평 2권, 57)”→일제 식민지배 때 한국민들이 행복한 문화생활을 누린 것처럼 칭송 *소제목:생활 양식의 변화 ”사람들의 의식주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관료와 학생들의 제복은 서양식으로 바뀌었고, 서양식 복장을 차려입고 백화점 쇼핑을 즐기는 ‘모던 걸, 모던 보이가’ 등장하였다.…식생활에서도 변화가 일었는데, 도시의 상류층은 일본에서 들여온 조미료와 청량음료 등을 즐겼고 외국의 다양한 음식도 업하였지만…인구가 도시로 집중되면서 주택의 형태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식 2층 양옥인 문화 주택과 개량 한옥이 상류층의 가옥으로 등장하였다(한, 57~58)“-화학조미료광고 ”일본에서 발명한 화학조미료는 일제 강점기에 크게 인기를 끌면서 냉면·곰국 등 국물요리가 많은 우리 음식의 맛을 바꾸어 놓았다“→일제지배를 축복으로 서술→서정주에 대한 칭송“이러한 작품 활동으로 현대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사망 후 정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권력에 영합하는 친일파 시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의 친일 행위를 덮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쓴 아름다운 작품들은 우리 문학의 중요한 유산으로 인정해야’한다고 주장한다(한평, 63) ▲천재교과서 ‘2권 Ⅰ 일제식민통치와 민족운동’ 중 ‘04-사회·문화의 변화와 대중 운동’1. 도시와 농촌의 변화소제목:새로운 근대 도시가 발달하다”개항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전국적으로 근대 도시가 성장했다. 특히 철도교통의 중심지에 도시가 발달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항만 도시도 발달했다. 1930년대 이후에는 북부 지방의 공업도시가 발달했다. 도시에는 일제가 효율적인 식민 지배를 위해 만든 신작로가 놓이고 전차, 버스, 자동차 등 새로운 교통수단도 증가했다. 전차 노선을 따라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도시와가 진전되었다. 도시에는 전신과 전화가 보급되고 콘크리트와 석조로 된 건물이 증가했으며, 번화한 상점 거리와 백화점이 들어서기도 했다.(천재, 48)→일제 식민지배 칭송→역사둘레길의 ”문화전파의 부산고구려$ 수단“ 중 ”철도역이 들어선 곳에서는 새로운 도시가 생겨났다. 또한 기찻길을 따라 여행하는 철도 관광과 수학여행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수학여행을 떠난 학생들을 만주까지 놓인 철도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펑텐까지 다녀왔다→중앙 고등보통학교 수학여행 기념사진(천재, 48)그림 리베르 2권, 55쪽 일제 때 먹은 서양음식과 먹는 장소 맞추기 ▲리베르 교과서 ‘2권 일제식민통치와 민족운동’ 중 ‘4-사회·문화의 변화와 대중 운동’소제목 “교통과 통신의 발달” “도시의 변화” “대중문화의 유행과 생활 양식의 변화” “농촌의 변화” 등“일제강점기에는 영화, 라디오 등의 매체를 통해 서구문화가 소개되면서 대중문화가 유행하였다…한편 서울을 비롯한 도시에서는 옷차림이나 장식, 머리 모양 등에서 유행을 선도하는 모던 걸과 모던 보이가 등장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사치와 향락만 좇는 것처럼 여겨져 사람들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근대 문물의 도입, 근대 의식의 확산 등으로 생활양식이 변화하였다. 이에 따라 의식주 생활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먼저 의생활은 관료나 학생을 중심으로 양복과 양장이 유행하였다…식생활에서는 짜장면, 호떡, 어묵, 우동, 빵, 아이스크림 등이 판매되었고, 요릿집이나 양식당 같은 외식업이 대중화되었다. 양조간장이나 화학조미료를 넣은 요리법이 보급되기도 하였다. 주생활에서는 1920년대 이후 개량 한옥, 문화 주택 등 다양한 주택이 보급되기도 하였으며, 1940년대에는 공업 지역의 노동자들을 위한 영단 주택이 공급되기도 하였다(리베르 2권, 55)→일제 식민지배가 한국인들에게 축복인 것처럼 서술 ▲비상교과서 ‘2권 일제식민통치와 민족운동’ 중 ‘4. 사회·문화의 변화와 대중 운동’소제목 “도시 발달과 도시 빈민의 형성”“개항 이후 무역과 상업의 발달로 일자리가 늘어나자 도시가 성장하였다. 특히 교통수단이 발전하고 일제강점기 식민지 공업화가 추진되면서 도시 인구가 증가하였다. 1910년대 이후 형성된 신흥도시는 항만과 철도역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대전, 신의주 등은 철도 부설로 기차역이 들어서며 발달하였고, 인천, 군산, 목포 등은 항만 도시로 번성하였다. 1920년대 이후에는 공업중심지에 신흥도시가 만들어졌다.(비상 2권, 48쪽)”→일제 때 한국이 크게 발전한 것처럼 서술 3)민족문화 수호운동에서 조선총독부가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한국사를 왜곡했고, 민족주의 사학과 사회경제사학이 이에 맞섰다고만 서술하고,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이병도·신석호’ 등이 한국사 왜곡에 앞장 선 사실은 일체 누락 Ⅲ.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강역 왜곡 추종1. 낙랑군의 위치 (1)낙랑군의 위치를 지도에서 평양으로 표기(천재 1권 12쪽, 동아 1권 15쪽 등 대부분의 교과서)→낙랑군의 위치를 평양으로, 한사군의 위치를 북한으로 서술하고 지도로 그린 것에 대해 많은 지적과 항의를 받고, 한사군에 관한 서술은 편수지침에서 빠졌으나 지도에 부산고구려$ 낙랑군을 평양으로 표기하는 것으로 ‘낙랑군=평양설’과 ‘한사군=한반도설’ 계속 유지→낙랑군은 평양/삼한은 한반도 남부로 고정시킨 것은 조선총독부 그림 낙랑군과 삼한(비상 1권 10쪽)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심상소학국사 보충교재》는 고대 한반도 북부와 남부를 나누어 북부는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이 되었고, 남부는 ‘삼한→임나일본부’가 되었다고 썼다. 《심상소학국사 보충교재》는 ‘1. 상고시대의 조선반도 2. 삼한’으로 나누고, 단군을 삭제하고 ‘기자조선’부터 시작했다. 중국에서 기자가 와서 반도 북부를 차지했고, 그 후 위만이 이 지역을 차지했고 한나라가 북부조선(북한)에 한사군을 세웠다면서 “이로부터 수백 년 동안 반도의 대부분은 중국의 영지(領地)가 되었다”고 썼다. 이 책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전한 〈교수요지〉는 “조선반도의 연혁은 북부와 남부가 크게 다르다. 북부는 예로부터 중국에서 온 사람들이 통치했으며, 따라서 중국의 속국(屬國) 또는 영토였다는 사실을, 남부는 곧 조선인의 조상인 한족(韓族)의 거주지로서, 이 지방은 일찍부터 일본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사군’에 대한 〈교수요지〉는 “기자 때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나 마찬가지 상태였지만, 이때에 이르러 완전히 중국의 영지(領地)가 되었다.”라고 쓰고 있다. 현재 중국은 ‘동북공정’ 등의 각종 국가공정을 통해 고대 북한 강역 대부분을 중국 강역으로 설정하고 있는데, 그 대부분의 논리가 ‘낙랑군=평양설’인데 2025년 검정교과서①과 2014~2024년 검정교과서②는 모두 이런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중국 고대 사료와 지리지들은 한반도 북부가 아니라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樂浪郡, 故朝鮮國也. 在遼東](《후한서》 광무제 본기 건무 6년(서기 30년 주석)→낙랑군의 위치는 평양이 아니라 고대 요동이라는 것 ㈏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그 땅은 요동에 있다[長岑縣,屬樂浪郡,其地在遼東](《후한서》 최인열전의 주석)→낙랑군 산하 장잠현은 평양이 아니라 요동에 있다는 것㈐지금의 하북성 노룡현에는 “(하북성 노룡현은) 수나라 때 노룡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또 조선성(朝鮮城)이 있는데, 영평부 북쪽 40리이고, 한나라 낙랑군 속현이다[隋改曰盧龍縣。又朝鮮城,在府北四十里,漢樂浪郡屬縣也]”(《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그림 고려행정구역(천재 1권 21쪽)→현재 하북성 노룡현이 한나라 낙랑군 조선현이 있던 자리라는 것 이외에도 수많은 중국 사료들은 낙랑군은 고대 요동(현재의 하북성)에 있었다고 말하지 지금의 북한 평양에 있었다고 말하는 사료는 없다. 해방 후에도 국사편찬위원회가 조선총독부의 《심상소학국사(일본사)보충교재》의 역사왜곡 관점을 그대로 추종한 결과이다. (2)고려 강역 2천여 리 축소 왜곡→9종 교과서 모두 고려의 북방 강역을 압록강에서 함경남도까지 동남쪽 사선으로 그려놓고 있다. 고려는 한반도의 2/3밖에 차지하지 못한 못난 국가라는 뜻이다. 실제는 그렇지 않다. 고려 북방강역은 부산고구려$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 선춘령이다. 고려 북방 강역에 관한 기본자료 ①《고려사》 〈지리지 동계〉“예종 2년(1107)에 평장사 윤관이 원수가 되어 지추밀원사 오연총을 부원수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쳐서 쫓아내고 9성(城)을 두었으며, 공험진의 선춘령에 비석을 세워 경계로 삼았다…비록 연혁과 명칭은 같지 않지만 고려 초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공험(公嶮) 이남에서 삼척(三陟) 이북은 통틀어 동계라 일컬었다.(《고려사》 〈지리지 동계〉)” →고려 예종 2년(1107) 윤관이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비석을 세운 공험진 선춘령이 고려의 북방 경계그림 고려 지방행정구역(한평 1권 28)②《세종실록지리지》 〈함길도 경원도호부〉“(두만강가 경원도호부의)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바다까지 20리, 서쪽으로 경성(鏡城) 두롱이현까지 40리, 남쪽으로 연해(連海) 굴포(堀浦)까지 12리, 북쪽으로 공험진까지 7백 리, 동북쪽으로 선춘현까지 7백여 리, 서북쪽으로 오음회의 석성기(石城基)까지 1백 50리이다.”→두만강가의 경원에서 공험진까지 북쪽 700리, 선춘령까지 동북쪽 7백여리라고 명기 ③이익, 《성호사설》 〈윤관비〉“윤관의 비는 선춘령에 있는데 두만강 북쪽 7백 리가 되는 곳이다…윤관이 육성(六城)을 설치하고 공험진(公嶮鎭)을 세웠다.” (3)《온 국민을 위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의 고려·조선 북방강역 그림 《온 국민을 위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 2권“예종 2년(1107) 윤관이 두만강 북쪽의 여진족을 북방으로 내몰고 공험진公嶮鎭 선춘령先春嶺에 고려강역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공험진은 두만강 북쪽 688리 지점이다. 그래서 성호 이익을 비롯한 조선 시대 학자들이 공험진을 두만강 북쪽 700리로 지칭했다. 현재 공험진을 함경남도 안변 등지로 보는 것은 일본인 식민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 등의 왜곡된 주장을 따르는 것이다.(온 국민을 위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 ①397쪽 및 432쪽 지도)” (4)고려·조선 북방강역에 관한 1차 사료 1)한국 사료①《고려사》 〈지리지 동계〉“예종 2년(1107)에 평장사 윤관이 원수가 되어 지추밀원사 오연총을 부원수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쳐서 쫓아내고 9성(城)을 두었으며, 공험진의 선춘령에 비석을 세워 경계로 삼았다…비록 연혁과 명칭은 같지 않지만 고려 초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공험(公嶮) 이남에서 삼척(三陟) 이북은 통틀어 동계라 일컬었다.(《고려사》 〈지리지 동계〉)” →고려 예종 2년(1107) 윤관이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비석을 세운 공험진 선춘령이 고려의 북방 경계 ②《고려사》 〈우왕 14년(1388)〉명(明)에서 철령위(鐵嶺衛)를 세우고자 하니, 우왕이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 보내어 표문으로 청하였다.“…조종으로부터 전해내려온 데에 구역이 정해져 있으니, 철령(鐵嶺) 이북을 살펴보면, 역대로 문주(文州)·고주(高州)·화주(和州)·정주(定州)·함주(咸州)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公嶮鎭)에 이르니, 원래부터 본국의 땅이었습니다.”(《고려사》 〈우왕 14년(1388)〉)→우왕이 명에 보낸 국서에 철령(지금의 심양 남쪽)부터 공험진(두만강 북쪽 700리)는 고려 땅이라고 표명 ③《고려사》 〈박의중 열전〉“(이후 박의중은)성균대사성으로 옮겼다가 밀직제학에 임명되었고 부산고구려$ 남경(南京:명 초기 수도)에 〈사신으로〉 가서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돌려주도록 요청하였다”(《고려사》 〈박의중 열전〉)→우왕 14년(1388) 박의중이 현재 심양 남쪽 철령 이북의 땅은 고려강역이라고 요청 ④《태종실록》“조사해 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東北地方)은 공험진(公嶮鎭)으로부터 공주(孔州)·길주(吉州)·단주(端州)·영주(英州)·웅주(雄州)·함주(咸州) 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태종실록》 4년(1405) 5월 19일)→예문관 제학 김첨(金瞻)을 명에 계품사로 보내면서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부터라고 말한 태종의 국서 ⑤《태종실록》홍무 21년에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성지(聖旨)를 받은대로, ‘공험진 이북은 요동으로 환속(還屬)하고, 공험진 이남에서 철령까지는 그대로 본국(本國:조선)에 붙여 달라.’고 청하기 위하여, 배신(陪臣) 김첨을 보내어 국서를 들고 가서 주달하게 했는데, 그해 10월 11일에 〈김첨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와서 전한 칙서(勅書:황제의 국서)를 받으니, ‘삼산천호(三散千戶) 이역리불화(李亦里不花:이지란의 아들 이화영) 등 열 곳의 인원(人員)을 허락한다.’고 하셔서 저는 일국(一國)의 백성들과 더불어 감격하여 마지 아니하였습니다 (《태종실록》 5년(1405) 5월 16일)→태종 5년에 태종이 김첨을 보내 철령부터 공험진까지 조선의 강역이라고 주장했는데 명의 성조 영락제가 이를 인정했다는 내용 ⑥《세종실록》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렀다.“고려의 윤관(尹瓘)은 17만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女眞)을 소탕하여 주진(州鎭)을 개척해 두었으므로, 여진이 지금까지 모두 우리 나라의 위엄을 칭찬하니, 그 공이 진실로 적지 아니하다. 관이 주(州)를 설치할 적에 길주(吉州)가 있었는데, 지금 길주가 예전 길주와 같은가. 고황제(高皇帝)가 조선 지도(地圖)를 보고 조서(詔書)하기를, ‘공험진(公險鎭) 이남은 조선 강역이다. ’라고 하였으니, 경들이 참고하여 아뢰라”(《세종실록》 15년(1433) 3월 20일)→명 태조 주원장이 공험진 이남은 조선 강역이라고 인정했으니 여기까지 조선강역이라는 뜻. ⑦《세종실록》-세종은 재위 21년(1439) 공조참판 최치운을 북경으로 보내면서 강역에 관한 국서를 전달했다.“홍무 21년간에 태조 고황제의 성지(聖旨)를 받은대로, ‘공험진 이북은 다시 요동으로 환속시키고 공험진 이남부터 철령까지는 그대로 본국에 소속시켜달라.’고 배신 김첨을 보내어 표문을 가지고 주달하게 하였더니, 당년 10월 초1일에 경사(京師)에서 돌아왔는데 그 칙서에, ‘삼산천호 이역리불화 등 10처의 인원은 청하는 것을 인정한다.’고 했습니다” (《세종실록》 21년(1439) 3월 6일)→세종이 최치운을 보내 조선의 국경이 철령부터 공험진까지라는 것을 다시 확인시킴 2)중국 사료 ①《원사》 〈식화지〉지원 13년(1276), 또 요동의 쌍성 및 화주 등지에서 금을 캤다.至元十三年,又於遼東雙城及和州等處採焉→일본 및 한국 역사학계는 원의 쌍성과 화주가 함경도 영흥이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원사는 쌍성과 화주가 요동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②《명사》“요동의 철령위에 한 말만한 혜성이 떨어졌다[遼東鐵嶺衞墜火如斗](《명사(明史)》 〈오행지(五行志)〉 )”→철령은 함경도가 아니라 요동에 있다는 뜻. ③《명사》“철령위는 홍무(洪武) 21년(1388) 3월 옛 철령에 설치했다가, 홍무 26년(1392) 4월 부산고구려$ 옛 은주 땅으로 옮겼는데 곧 지금 철령위를 다스리는 곳이다. 철령 서쪽에는 요하(遼河)가 있고 동쪽에는 범하(汎河)가 있고, 또 남쪽에는 소청하(小淸河)가 있는데 모두 흘러서 요하로 들어간다. 또 성 남쪽에는 의로성(懿路城)이 있는데 홍무 29년 의로천호를 여기에 설치했다. 또 범하성(范河城)이 철령위 남쪽에 있는데 또한 범하성(汎河城)이라고 하고, 정통(正統) 4년 범하천호를 이곳에 설치했다. 철령위 동남쪽에 봉집현(奉集縣)이 있으니 곧 옛 철령성이고, 고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홍무 초년에 현을 설치했다가 곧 폐지했다. 또 함평부가 있는데 원래는 요동행성(遼東行省)에 속해 있었고, 지정(至正) 2년 정월 강등시켜 현이 되었다가 홍무 초에 폐지했다.”(《명사(明史)》 〈지리지 산동(山東) 요동도지휘사사 철령위〉”→철령위는 서쪽에 요하가 있고 남쪽에 범하가 있었다. 철령위 동남쪽에 있는 봉집현이 고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데, 이곳은 현재 요녕성 심양시 남쪽에 있다. ④《명사》“이성량은 자가 여계이다. 고조 이영이 조선에서 와서 귀부했는데 대대로 철령도지휘첨사를 제수 받고 일가를 이루었다”《명사(明史)》 〈이성량 열전〉)→임란 때 명군의 도독으로 왔던 이여송의 부친 이성량 열전. 요녕성의 철령 이씨{농서(隴西) 이씨}→이성량 일가 무덤은 요녕성 철령시 철령현 催阵堡乡 新坟村(催阵堡 高句丽山城:고구려 중기 성)에 있다. 철령도지휘사사를 역임한 이성량(여송) 일가 무덤이 왜 함경도 안변이 아니라 요녕성 철령현에 있겠는가? 3)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조작한 고려·조선 북방강역 ①쓰다 소키치가 함경도 남쪽으로 왜곡한 공험진 “공험진은 (함경도) 길주 남쪽에 있다.”(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尹瓘征略地域考」(『朝鮮歷史地理』2, 南滿洲鐵道株式會社, 1913)→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의 역사왜곡을 지금껏 추종하는 한국사교과서 ②그 외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의 고려 강역 왜곡 논문들稻葉岩吉, 「高麗尹瓘九城考-特に英雄二州の遺址に就て-(上)」(『史林』16-1, 史學硏究會, 1931)稻葉岩吉, 「高麗尹瓘九城考-特に英雄二州の遺址に就て-(下)」(『史林』16-2, 史學硏究會, 1931)池內宏, 「完顔氏の曷懶甸經略と尹瓘の九城の役」(『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1922)津田左右吉, 「尹瓘征略地域考」(『朝鮮歷史地理』2, 南滿洲鐵道株式會社, 1913)松井等, 「滿洲に於けゐ遼の疆域」(『滿洲歷史地理』2, 南滿洲鐵道株式會社, 1913)池内宏 公孫氏の帯方郡設置と曹魏の楽浪帯方二郡/(滿鮮史研究) 1930이덕일 역사TV 구독과 알림설정이 우리아이들에게 바른 역사를 배우도록 하는 길입니다.클릭 구독과 좋아요 알림설정교육위, 역사 교과서 공방 2024-09-24 역사교육 왜곡없는 교육으로 나가려면...일선 학교서 '역사 왜곡 교과서'채택 않도록 신중 기해야"2024.09.23[BY 시민] 대한민국역사교과서 카드뉴스 두번째 입니다.대한민국역사교과서는 광복 80년만에 나온 온...naver.me우리사관을 바로잡는 역사얼마 전 대한민국역사교과서 편찬위원회가 편찬한 '대한민국역사교과서ɱ, 2권이 집에 도착했습...naver.me교과서 ‘식민사관’ 논쟁에 불 지필 책…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인터뷰]경기일보 | 네이버 2024.5.22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1945년 광복 이후 지금까지 발행했던 모든 ‘역사(국사) 교과서’는 국정·검인정을 막론하고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발간한 ‘심상소학 국사(일본사)’의 조선사 부분과 본질적 차이가 없다.naver.me우리아이들에겐 우리역사관으로 된 교과서로 가르치자!교과서 ‘식민사관’ 논쟁에 불 지필 책…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인터뷰] 출처 : 경기일보 | 네이...naver.me
댓글목록 0